들어가며
지난 주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은 예상보다 더 큰 패배를 당했다. 양당의 텃밭을 제외한 7개 경합주에서 트럼프 후보는 전승을 거두어 선거인단 수에서 312대 226으로 압승했다. 지역, 인종, 계층의 거의 모든 유권자 집단에서 트럼프 지지율은 2020년에 비해 상승해서 전체 유권자 득표에서도 해리스를 앞섰다. 대선과 동시에 치루어진 의회 선거에서도 공화당은 상원 다수당이 되었고, 하원 역시 다수당이 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공화당 싹슬이(Red Sweep)가 현실화된 것이다.
민주당 참패의 원인에 대한 많은 분석이 쏟아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미국의 유권자 구조, 후보와 정당의 매력도, 선거 운동의 유효성 등 다양한 측면이 있겠지만 나는 민주당 선거 패배의 이유로 인플레이션이 가장 중요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난 4월 한겨레신문 컬럼 ‘바이드노믹스… 뜨거운 경제, 냉담한 표심’이라는 글에서 우려했던 바대로 민주당은 경제, 특히 인플레이션에 발목이 잡혔다.
당파별로 갈라진 이슈
대선 출구 조사를 보면 유권자들이 자신의 표를 결정할 때 고려한 가장 중요한 이슈는 정치 성향별로 뚜렷이 갈라졌다. 해리스에 투표한 유권자는 민주주의와 낙태를, 트럼프를 선택한 유권자는 이민과 경제를 꼽았다. 경제 이슈에 국한해서 보면, 공화당 지지자들은 바이든 정부의 경제 실정에 대한 응징 투표를 한 것이고, 민주당 지지자들은 경제 이슈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낙태의 선택권을 지키기 위해 투표를 했다고 볼 수 있다.
It’s Economy, Stupid!
이슈의 중요도가 진영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졌다면 그 중 더 중요한 이슈는 무엇이었을까? 퓨리서치 조사에 의하면 ‘이번 선거에서 경제가 매우 중요하다’고 답한 비율이 81%로 모든 항목 중에서 가장 높았다. 정치성향으로 구분해 보면 공화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93%로 특히 높았지만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68%로 낮지 않았다. 갤럽 등 다른 조사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발견된다.
갤럽은 1996년부터 유사한 조사를 해왔기 때문에 시계열로도 비교해 볼 수 있다. ‘경제가 투표에 극히 중요하다’라고 답변한 유권자 비율은 여덟 번의 선거 중 두번째로 높았다. 조사 대상 중 이 값이 가장 높았던 것은 2008년으로 글로벌 금융 위기 한복판에서 치루어진 선거 때였다. 경제는 이번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였고, 역대 다른 선거에 비해서도 특히 중요하게 부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It’s Inflation, Stupid!
경제의 구성 항목은 다양한데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압도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미국 국민 중 41%가 인플레이션을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로 꼽았다. 공화당 지지자들 중에서는 56%였을 뿐 아니라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28%였다. 인플레이션은 당과 무관하게 가장 중요한 경제 이슈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인플레이션 못지 않게 선거에서 중요할 것으로 보였던 일자리를 꼽은 국민이 불과 8%여서 인플레이션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이는 일자리에 대한 업적을 특히 강조하려고 한 민주당 측으로서는 안타까운 지점이었다.
인플레이션 비교 1 – 전년대비 물가상승
바이든 정부의 인플레이션은 도대체 얼마나 심각했던 것인지 트럼프 정부와 비교해서 살펴보자. 통상 경제학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물가상승률은 현재의 물가수준을 12개월 전 물가수준과 비교하는 것(전년동월대비)이다. 이 값을 보면 트럼프 정부는 가장 높았을 때가 2017년 2월 2.8%였다. 반면 바이든 정부는 취임 후 급격히 물가가 상승하기 시작해서 2022년 6월 9%까지 치솟았다. 9%는 1981년 11월 이후 가장 높아 40년 이상 볼 수 없었던 값이라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인플레이션 비교 2 – 임기 중 누적 물가상승
2022 중반 이후 물가상승률이 낮아져 올해 9월에는 2.4%까지 하락했으니 인플레이션 문제는 정상화되었다는 주장도 있다(경제학자들이 생각하는 정상적인 물가상승률은 대체로 2% 안팎이다).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적 관점에서 전년대비 또는 전월대비 물가수준 변화에 주목하지만 이것은 과거 상승한 물가상승의 효과를 온전히 보여주지 못한다. 유권자가 어떤 시계에서 물가상승을 평가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4년 임기 대통령제를 고려할 때 선거에서는 취임 후 얼마나 물가가 상승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트럼프 정부는 출범부터 선거가 있는 해 9월까지 누적해서 7.2% 올랐지만 바이든 정부는 같은 기간동안 20.5% 올랐다. 한눈에 봐도 격차가 매우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플레이션과 임금
임금이 상승하더라도 물가가 더 빠르게 상승한다면 실질 소득은 오히려 줄어들게 된다. 그림을 보면 트럼프 정부의 전기간 동안 일관되게 임금상승률이 물가상승률보다 높았고, 그 차이의 평균은 1.58%포인트였다. 반면 바이든 정부의 전반부는 임금보다 물가가 더 빠르게 상승했고 후반부에 가서 이 추세가 역전되었다. 그 차이의 평균은 0.05%로 사실상 4년동안 실질소득은 거의 상승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비자심리로 본 당파성
정치권에서 유권자 동향을 살필 때 중시하는 경제 지표 중 대표적인 것이 소비자심리지수(Consumer Sentiment Index)이다. 소비자와 유권자는 거의 겹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소비자심리를 조사해보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집권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 뚜렷한 차이가 난다. 트럼프 정부에서 바이든 정부로 넘어가면서 공화당 지지자들의 소비자심리지수가 하락하고 반대로 민주당 지지자들의 경우 상승한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두가지 점이 더 보인다. 첫째 양당의 지지자가 아닌 집단(인디펜던트)은 민주당 지지자들이 아닌 공화당 지지자들과 유사한 방향으로 움직였다(강도만 달랐다). 또 공화당 지지자들의 하락 폭이 민주당 지지자들의 상승 폭보다 월등히 컸다. 사실 민주당 지지자들의 소비자심리지수는 두 정부에 걸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민주당 입장에서 보면 ‘공화당 지지자들이 민주당 지지자들에 비해 더 당파적이다’라고 할 것이고, 공화당 입장에서 보면 ‘민주당 지지자들조차 바이든 정부 경제 운영에 대해 별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주장할 것이다. 후자의 해석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플레이션 원인에 대한 정치권의 논쟁
인플레이션이 선거에서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양당은 서로 이름붙이기 게임을 하였다. 공화당은 바이든 정부의 무책임한 대규모 재정 확대 때문이라며 ‘바이든 인플레이션(Bidenflation)’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공격했다(바이든에서 해리스로 교체된 후에는 해리스에게 ‘바이든과 무엇이 다르냐’며 따졌다). 반면 바이든은 인플레이션에 대해 공화당을 탓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푸틴 때문(Putin Price Hike)이라고 하거나, 대기업의 탐욕 때문(Greedflation)이라고 책임을 돌리려 시도했다.
해리스는 대통령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에 대해 바이든만큼 직접적인 책임을 지지는 않지만, 그 정부의 부통령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자유롭지도 못했다. 집권하면 가격통제를 도입하겠다는 무리수를 들고 나왔다가 비판을 받자 어정쩡하게 봉합했고, 바이든과의 차별성도 뚜렷하게 제시하지 못했다.
인플레이션 원인에 대한 민주당 경제학자들의 논쟁
인플레이션 자체와 그 정치적 영향에 대해 가장 일찍 또 가장 강력하게 경고했던 것은 오바마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로렌스 서머스였다. 그는 바이든이 집권한지 얼마되지 않은 2021년 5월 ‘인플레이션 위험은 현실이다’라는 글을 통해 논란을 격발시켰다. 불과 6개월 전까지 저성장과 실업 그리고 디플레이션(!)의 위험을 주장하던 서머스는 팬더믹 종식, 연준의 제로금리 지속 전망 및 대규모 재정정책(America Rescue Plan)을 언급하며 인플레이션 위험이 현실화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68년 리처드 닉슨의 당선과 1980년 로덜드 레이건의 당선에서 인플레이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경고했다.
이 반대편에 선 대표가 바이든 정부의 수호자를 자처한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이었다. 그는 인플레이션이 재정정책의 효과가 아니라 팬더믹으로 인한 공급망의 일시적 장애 때문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곧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위 인플레이션에 대한 ‘지속파(Team Permanent)’와 ‘일시파(Team Transitory)’의 논쟁이었다. 인플레이션이 2022년을 넘어 23년도까지 고공행진을 하자 결국 크루그먼도 ‘인플레이션, 내가 틀렸다‘라는 컬럼을 통해 미국구조플랜이 야기한 인플레이션 위험을 과소평가했다고 잘못을 인정했다. 미국구조플랜은 바이든의 공약을 입법화한 재정정책으로 인별로 현금을 1,400달러 지급하는 등 총 1조9천억달러 규모였다.
교훈
한동안 나 역시 ‘바이든 정부의 다른 경제 지표는 나쁘지 않은데, 미국 유권자들이 인플레이션 하나만으로 너무 가혹하게 평가하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치에서는 이것이 현실이다. 누군가가 실업에 처하지 않고 직장을 유지하고 있을 때 이것을 정부 정책 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모두 다 정부를 탓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심각한 인플레이션은 경제적 약자를 더욱 힘들게 하고, 정부의 신뢰를 근간에서 뒤흔든다. 또 인플레이션 정치가 특정 정당에게만 불리한 것도 아니다. 서머스가 닉슨과 레이건의 당선을 얘기했지만, 민주당의 지미 카터가 1976년 선거에서 승리할 때도 닉슨/포드 정부의 높은 인플레이션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번 인플레이션은 정부의 정책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쳤겠지만, 정부가 정치적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지난 한국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 참패한 여러 이유 중 하나가 ‘대파 가격’으로 상징되는 인플레이션이었다. 인플레이션이 고개를 처들면 그 정치적 후폭풍은 시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상당 기간 지속된다. 모든 정치인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