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넷 옐런을 통해 본 경제와 정치의 접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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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다음 책에 대한 서평으로 서울리뷰오브북스(제13호, 2024 봄)에 실린 글이다. 서울리뷰오브북스의 허락을 받아 이곳에 전문을 게재한다.

<재닛 옐런>, 존 힐센라스 저, 박누리 역, 2024, 마르코폴로

경제인의 전기, 자서전, 회고록은 압도적으로 기업가들에게 집중되어 있다. 철강왕과 석유왕으로 불렸던 19세기의 앤드루 카네기와 존 록펠러는 백 년 이상 ‘위인전’의 단골 메뉴였고,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전기는 지금도 세계적 베스트셀러이다. 반면 경제학자는 애덤 스미스나 존 메이너드 케인스 정도가 아니면 전기를 찾아보기 힘든데, 대중의 관심도 차이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경제 정책을 담당하는 관료는 전기의 소재로 그 중간쯤 된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무부 장관으로 꼽히는 알렉산더 해밀턴과 앨버트 갤러틴 그리고 근래 재무장관을 역임한 로버트 루빈과 팀 가이트너의 전기와 회고록은 국내에도 소개되어 있다. 지난 40년간 미국 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했던 폴 볼커, 앨런 그린스펀, 벤 버냉키의 회고록도 널리 읽히고 있다. 국내 인물들의 경우도 비슷하다.

자넷 옐런은 세계의 어떤 경제 관료보다 더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다. 대통령 경제자문위원장(1997-1999)주1,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 의장(2014-2018)주2 및 재무부 장관(2021-) 등 미국 최고위 경제 정책직 셋을 모두 거친 유일한 인물이다. 각각의 임명권자는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조 바이든 대통령으로 지난 30년간 모든 민주당정부에서 중용되었다. 정부 활동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학계의 업적도 상당하다. 하버드대와 런던정경대 조교수를 거쳐 버클리대에서 종신 교수가 되었고 미국경제학회장(2020-2021)을 역임했다.

옐런이 박사학위를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1970년대는, 사회 전체적으로도 그랬지만 특히 경제 분야에서 여성의 지위가 극히 취약했다. 옐런은 조용하고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유리 천장을 깨트리면서 새로운 기록을 역사에 남겼다. 연준 의장과 재무부 장관직을 맡은 것은 모두 여성으로서는 미국 최초였는데, 이런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다. 주요 국가 중 옐런에 버금가는 경력을 가진 여성 경제 관료는 프랑스 재무부 장관과 국제통화기금 총재를 거쳐 유럽중앙은행 총재직을 수행하고 있는 크리스틴 라가르드 뿐이다.

옐런과 애컬로프, 러브 스토리

‘대통령 경제자문위원장, 연준 의장, 재무부 장관, 미국경제학회장, 노벨 경제학 수상자가 매일 저녁 식사를 하며 경제 현안을 논의하는 모임은 무엇인가’라는 농담이 있다. 정답은 자넷 옐런과 조지 애컬로프 부부이다. 애컬로프는 2001년 정보 비대칭에 대한경제학적 분석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중고차 시장에서 자동차의 상태에 대한 판매자와 구매자의 정보가 다를 경우를 분석한 그의 1970년 논문은 이 분야의 선구가 된 기념비적 연구이다.

애컬로프는 1978년 결혼 이후 옐런과 경제 연구를 공동으로 수행했고, 공직자 옐런의 사회 활동을 자신의 커리어 개발보다 항상 앞에 두고 적극 지원해 왔다. 옐런이 유명해지면서 동료들이 애컬로프를 ‘미스터 옐런’이라고 부르는 것을 불쾌해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기까지 했다. 아들 로버트의 통학도 맡아 했는데, 다른 학부모들이 애컬로프를 실업자로 오해할 정도였다고 한다.

존 힐센라스는 인터뷰에서 이 책을 ‘러브 스토리’라고 부를 정도로 두 사람의 특별한 모습에 주목하고 있다. 출간 직전까지 ‘옐런: 격변의 시대를 헤쳐 나간 선구적 경제학자’와 ‘자넷과 조지:미국 최고의 파워 커플은 어떻게 경제의 폭풍을 헤쳐 나갔는가’라는 두 개의 제목 사이에서 고심했다고 한다. 주인공의 유명세 때문에 최종적으로 전자가 채택되었겠지만, 사실 후자가 이 책의 실질을 더 잘 살리는 제목이다. 특히 책의 전반부는 장별로 옐런과 애컬로프의 이야기를 교차로 배치했을 정도로 두 명의 전기에 가깝다.

어린 시절의 교훈

글로벌 금융 위기 여파로 경제가 활력을 되찾지 못하고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던 2009년 일이다. 샌프란시스코 연준의 경제학자들이 실업률이 몇 년에 걸쳐 서서히 하락할 것이라는 데이터를 옐런에게 보고하자, 옐런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 숫자들은 그냥 숫자가 아냐. XX 사람들이라고.’ 절제된 표현으로 유명한 옐런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옐런과 애컬로프는 ‘실업은 존재하더라도 시장이 저절로 교정하도록 두어야지 정부가 적극적으로 정책을 펴는 것은 곤란하다’는 극단적 시장주의에 맞서 실업을 줄이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 정책을 강력히 옹호한 경제학자였다.

힐센라스는 옐런과 에컬로프가 실업자들이 겪는 고통에 대한이야기를 들으며 경제학에 이끌렸다는 것을 강조한다. 옐런은 소녀 시절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의사였던 아버지가 들려주던 ‘일자리를 잃은 후 우울증, 알코올 중독, 이혼의 소용돌이에 빠진 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실업의 고통을 의식했다고 한다. 또 애컬로프는 아버지가 직장을 여러 차례 옮기면서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여섯 번이나 이사를 한 후 직장을 잃는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하지만 옐런이 접한 실업의 고통은 자신이 겪은 것도 아니고 자신의 친구나 이웃의 이야기도 아니다. 옐런의 가족은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휴가 때는 크루즈 여행을 하고 흑인 가정부를 둘 정도로 넉넉했다. 여러 차례 이직을 한 애컬로프의 아버지는 예일대와 프린스턴대, 정부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화학자였고 마지막에 직장 생활을 하지 않을 때조차도 동료들과 정부 자금으로 연구실을 운영했다. 옐런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혹독하게 교육시켰고 애컬로프의 어머니는 아들이 대학 시절 수학 공부에 곤란을 겪자 세계최고의 수학자 중 하나였던 프린스턴대의 살로몬 보흐너로부터 특별 개인 교습을 받게 해줄 정도의 능력의 소유자였다. 옐런과 애컬로프 외에도 이 전기에는 많은 유명 경제학자들이 등장하는데 거의 대부분이 부유하거나 명성 높은 지식인 집안 출신이다. 그런 점에서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느끼게 해준 훌륭한 가정 교육은 그 자체로 높게 평가할 만하지만, 미국의 지식인들이 대체로 일반대중의 삶과 상당히 유리되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옐런과 정치

클린턴은 재선에 성공한 후 옐런을 경제자문위원장으로 임명했는데, 힐센라스는 이를 옐런의 커리어에서 ‘가장 불쾌한 경험 중 하나’라고 규정했다. 이 표현이 옐런 자신의 것인지 힐센라스의 짐작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연준과는 달리 백악관에서 옐런이 힘들어하고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스스로를 ‘초당파적’ 인물로 생각한 옐런은 정치를 최우선에 두어야 하는 백악관 분위기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중요 현안이었던 기후·환경 문제가 옐런의 주 업무였는데,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 옐런은 이 이슈를 주도하던 앨 고어 부통령에게 너무 공격적으로 움직이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의회에서는 ‘이 문제는 너무 복잡해서 경제적 상충에 대한 정확한 모델을 세울 수 없다’고 발언했다가 좌우 모두로부터 집중포화를 받기도 했다. 미국이 탄소 배출량을 2010년까지 1990년 수준으로 줄이겠다는 교토의정서에 서명한 후에는 어정쩡한 추정치를 발표해서 다시 한번 양측의 비판을 받았다. 클린턴은 결국 의회의 반대를 뚫지 못할 것이 분명해진 교토의정서 법안을 제출조차 하지 못했다.

옐런은 정치의 현장에서 주역이 되지 못했다. 당시 클린턴 정부 경제팀은 재무부 장관 밥 루빈, 부장관 래리 서머스, 국가경제위원장주3 진 스펄링의 삼각 체제였다. 이들은 1988년 민주당 마이클 두카키스 캠프에서 한 팀이 된 후 1992년 클린턴 캠프에서 대선 승리에 기여한 공신들이었다. 옐런은 자문위원장직을 마친 후인터뷰에서 이 셋에 대해 ‘대통령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선거운동 초기부터 함께했던 사람들로, 나는 그런 친밀감을 쌓을 기회가 없었다’고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사실 대통령 경제자문위원장은 중요한 자리이지만 집행을 담당하는 재무부나 정책 이견을 조정하는 국가경제위원장과는 비교할 수 없다. 또 교토의정서 처리 과정이 늪에 빠진 것은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옐런 자신이 분명한 입장으로 주도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때의 경험과 반성은 바이든 대통령 당선 이후 재무부 장관직을 수행할 때 자양분이 된 것으로 보인다.

옐런과 서머스, 라이벌

이 책에는 옐런과 애컬로프 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옐런의 지도교수이자 평생의 멘토였던 제임스 토빈, 연준 부의장 시절 의장이었던 벤 버냉키도 자주 나오지만 특히 강조된 것은 래리 서머스이다. 서머스는 하버드대 시절 옐런의 수업을 들은 제자였고학문적 입장도 가까우며 여러 차례 협력을 한 사이이다. 옐런은 연준 의장 재직 당시에 서머스의 ‘장기 침체(secular stagnation)’론에 공감하여 공화당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저금리 정책을 유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어려서부터 최고의 천재 소리를 듣던 서머스는 성격이 급하고 거침없이 발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기후변화에 대해 옐런과 서머스는 거의 유사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옐런이 절충적 표현으로 양측의 비난을 받은 것에 반해 서머스는 ‘부유한 국가가 가난한 국가에 환경 오염을 떠넘기는 것이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비용 분배 방법’이라고 자극적으로 작성된 문서에 서명했다. 이 이유로 고어 부통령의 미움을 받은 서머스는 클린턴 행정부 1기 때 백악관 입성에 실패하고 국제 금융담당 재무부 차관으로 밀려났다. 그는 이후 재기에 성공해 재무부 부장관을 거쳐 장관에 이르렀다.

2014년 연준 의장에서 물러나는 버냉키의 후임으로 옐런과 서머스가 떠올랐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국가경제위원장으로 서머스를 영입하면서, 버냉키가 물러나면 연준 의장에 임명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오바마가 고심하던 중 일은 엉뚱하게 풀렸다. 민주당의 진보파 상원의원들이 서머스의 거침없는 발언과 금융 규제 완화 입장을 끔찍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읽은 서머스는 결국 후보에서 빼 달라는 편지를 오바마에게 보낸다.

바이든 대통령은 2021년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1조 9천억달러 규모의 ‘미국인 구제 계획(American Rescue Plan)’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는 1인당 현금 1,400달러를 지급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선에서 정치적 이유로 선택된 이 금액에 대해 옐런은 경제적영향이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나, 이번에도 그녀는 선거 캠프에 참여하지 않은 아웃사이더 출신이었다. 옐런이 참석하지 않은 자리에서 현금 지원 정책이 결정되었는데, 옐런은 이번에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과는 달리 이 정책을 지지하고 인플레이션 우려는 거의 없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서머스는 다른 길을 갔다. 확장적 재정 정책을 강력히 옹호했던 서머스였지만 이번에는 ‘너무 많고 너무 빠르다’고 판단했다. 그는 바이든의 정책을 ‘지난 40년간 시행되었던 거시 재정정책 중 가장 무책임하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바이든의 모험은 빠른 경기 회복과 일자리 창출을 가져왔지만, 2022년 인플레이션이 활활 불타올랐다. 힐센라스는 옐런이 서머스의 주장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여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백악관 참모들은 옐런이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발언을 할 것을 우려해서 기자들 앞에 거의 세우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은 출처가 불분명해 정확한 진위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바이든과 백악관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공화당의 공격에 맞서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Putin Price Hike)고 반격을 폈다. 옐런은 2022년 5월 CNN에 출연해서 인플레이션에 관 해 추궁하는 앵커에게 ‘에너지와 식품 가격을 치솟게한 충격(즉 우크라이나 전쟁)을 예견하지 못한 잘못이 있었다’고 하면서도 바이든 정부의 재정 정책과의 관련은 인정하지 않고 버텼다.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두고도 옐런은 고심했다. 러시아에 대한 공세는 필요하지만 러시아 정부가각국에 예치한 자금을 동결하고 주요 은행을 달러 결제망에서 배제할 경우 미국 국력의 핵심인 기축 통화로서의 달러의 지위가 약화될 위험을 우려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백악관 안보실 스태프들은 엇박자를 냈다. 옐런에게 통보도 하지 않은 채 대통령에게 제재준비가 완료되었다고 보고했다. 옐런은 검토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안보실 주장을 그대로 따랐다. 이번에도 결과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경제 제재 직후 러시아 루블화의 가치는 폭락했지만 러시아는 곧 우회로를 확보했고, 루블화는 반등했다.

이 두 사건에서 보듯 옐런은 과거와는 달리 정치적 고려를 무조건 배척하지 않고 상당히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퇴행인지발전인지는 각자 판단할 일이나 경제의 최고 책임자라는 자리가정치와 명확히 선을 그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경제와 정치의 접점에서

독자들은 유명인들의 전기나 회고록에서 난관을 이겨 나간 영웅담이나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에 대한 폭로를 기대하기 마련이다.이 책은 그런 모습을 거의 담고 있지 않아 약간은 답답하거나 지루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옐런의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옐런이 2018년 연준 의장직을 마치자 많은 사람들이 전임자들의 전례에 따라 회고록을 쓸 것이라 예상했고 또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옐런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살지 않았다며 회고록 집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옐런이 금융 위기,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의 와중에 연준과 재무부에서 내린 결정은 미국과 세계 경제가 파국에 빠지는 것을 막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부작용 또한 초래했다. 그런 점에서 옐런의 경험은 잊혀져서는 안 되는 소중한 자산이다. 힐센라스는 옐런이 대통령 경제자문위원장으로 취임한 1997년부터 《월스트리트 저널》의 경제와 금융 분야 전문 기자이다. 특히 금융 위기와 연준의 대응에 대한 그의 기사는 퓰리처상 최종 후보로 오를 만큼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힐센라스의 치밀한 취재를 통해 우리는 옐런의 삶과 경험을 중심으로 지난 30년간 미국 경제 정책이 백악관, 재무부 그리고 중앙은행에서 어떻게 논의되고 형성되고 또 왜곡* 경제자문위원회(Council of Economic Advisers)는 대통령에게 경제 정책에 대한 자문을 제공하기 위해 1946년 백악관에 처음 설치된 기관으로, 흔히 한국의 국민경제자문회의와 유사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한국의 위원장과 위원은 모두 비상근이고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운 반면, 미국의 위원장과 위원은 상원의 동의를 받아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상근직으로 실질적 업무를 수행한다. 다만 업무의 범위는 대통령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되었는지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옐런 스스로의 목소리는 아니지만 이 책은 경제와 정치의 접점을 고민하는 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유익한 자료이다.

(주1) 경제자문위원회(Council of Economic Advisers)는 대통령에게 경제 정책에 대한 자문을 제공하기 위해 1946년 백악관에 처음 설치된 기관으로, 흔히 한국의 국민경제자문회의와 유사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한국의 위원장과 위원은 모두 비상근이고 사실상 명예직에 가까운 반면, 미국의 위원장과 위원은 상원의 동의를 받아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상근직으로 실질적 업무를 수행한다. 다만 업무의 범위는 대통령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주2) 연방준비제도는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열두 개의 민간 연방준비은행과 워싱턴D.C.의 정부 기구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로 구성되어 있는 반관반민 기구이다. 통상이사회의 책임자와 부책임자를 의장(chairperson)과 부의장으로, 연방준비은행의 책임자들을 총재(president)로 번역한다. 옐런은 연준 스태프 이코노미스트, 샌프란시스코연준 총재, 이사회의 부의장과 의장을 모두 역임했다

(주3) 클린턴 대통령 이후 백악관에 국가경제위원회(National Economic Council)가 설치된다. 이 기관의 디렉터는 국내의 경제수석보좌관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데, 일반적으로 위원장이라고 번역한다. 여기에서도 그 용례를 따랐지만 기구의 직제상 의장(Chair)은 대통령이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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